이 모습에 장철은 너무나 놀랐다.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질 않았다. 그것 때문에 송충식은 목숨을 잃었고 자기는 가까스로 살아왔는데… 어이가 없었다. 장철이 정신없어하는 사이 대장은 장철의 구두를 가리키며 “장 대원, 구두를 벗어주게”라고 말한다. 장철은 구두를 벗어 대장에게 넘겨 준다. 구두를 건네받은 대장이 구두 굽을 힘껏 비틀자 그 속에서 작은 필름 통 하나가 튀어나온다. 남은 구두의 굽에서도 필름 통이 나왔다. 장철은 뒤통수를 야무지게 맞은 듯 멍해졌다. HID는 정말 무서운 존재다. 자기가 이런 곳에서 일한다고 생
찢어버린 비밀 서류 장철이 눈을 떴을 땐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옆에 군의관이 한 명이 장철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리와 팔에 붕대가 감겨있는 것을 보니 정신을 잃은 사이에 구출돼 치료를 받은 것 같았다. 지켜보던 군의관은 “정신이 좀 드시오?”라고 말을 건넨다. 장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앉았다. 가져온 서류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고, 인민군 대기소에서 신고 온 구두는 침대 아래 놓여 있었다. 장철은 두 가지를 확인하고는 숨을 돌렸다. 곧 의무실에 다른 사병이 들어오더니 군의관에게 무엇인가 전하
인민군은 이들 앞까지 왔다. 그때 송충식은 마지막 힘을 다해 들고 있는 기관총의 방아쇠를 힘껏 당긴다. ‘두두두두두’ 충식은 자기 몸에 총알이 박히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인민군들은 충식의 총격에 이리저리 쓰러졌고 더 이상 진격을 못했다. 그 틈에 장철은 강가에 다다랐다. 그러나 강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배가 물살을 가르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강물이 허리춤까지 차는 곳에서 기다려야 하는 데 늦은 것이다. 그러나 배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장철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가 소몰이를 하는 식
그때를 기해 장철은 단검을 던졌다. 인민군은 “윽”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리자 송충식이 빠르게 그를 덮쳐 단검으로 가슴을 찌른다. 소리를 듣고 다른 인민군이 “뭐야 동무”라며 총을 들고 급하게 밖으로 나온다. 그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철이 날쌔게 한 손으로 인민군의 목을 감고 단검으로 가슴을 찌른다. 순간 인민군은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는 총 방아쇠를 당긴다. “탕!” 총알은 잔잔한 하늘을 찌르고 날카로운 총성이 적막한 산천을 갈라놓았다. 큰일이다. 총소리를 내지 말고 처치하라는 지침을 어긴 것이다.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두 대원
더 전진하니 앞이 확 트이면서 강이 나타났다. 배가 들어올 시간이 2분이 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대원은 미리 허리가 찰 정도의 물속으로 들어가 있고 안내원은 끝까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머리서 잔잔하게 배의 엔진 소리가 들린다. 두 대원은 강 깊은 곳으로 더 들어간다.이제 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배 한 척이 속력을 내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장철은 준비한 갈퀴 달린 줄을 배를 향해 던졌고, 밧줄을 잡고 배에 올랐다. 장철 뒤에 매달린 송충식이 위험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무사히 배에 오른다. 조타실에는 선장인 듯한 사람이 핸들을 잡
깊은 밤 대원들은 일렬로 서 있고 대장과 타 부대 장교들이 그들을 살펴본 다음, 교관이 앞으로 다가와 지휘봉으로 장철의 가슴을 찌른다. 그것은 차출됐다는 신호이다.그리고 서너 번 건너가더니 송충식 이병 앞에서 그의 가슴을 찌른다. 그날은 두 사람이 차출된 것이다. 곧 교관 네 명이 그들을 호위한다. 돌발상황에 대처하기 위함이다.장철과 송충식은 장교들의 뒤를 따라 지휘관실로 들어간다. 뒤의 연병장에서는 해산 소리가 들리고 대원들이 숙소로 돌아가고 있다. 장교들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서류를 정리하고 건네더니, 소령 계급장을 단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직후 장철이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놀란 나는 “아니 형, 헌병대에 끌려갔다더니 어떻게 나왔어?”라고 물었다. 그러자 장철은 목에 힘을 잔뜩 주며 “임마 내가 누구냐, 헌병들도 함부로 못 하는 사람이다. 나를 태우고 녹번동 사거리까지 가서는 ‘상사님 다시 그 술집으로 가지 말고 다른 데 가서 노십시오’하면서 내려 주더라”라고 말한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 후 대북 안보 강화정책으로 나라가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안보 부대의 기세는 대단했다. 장철의 부대 훈련소
나는 HID라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들어 왔고 또 그들이 무슨일을 하는 지도 알고 있었다. 1948년 건국 직후 창설된 육군 본부 정보국에서 대북 정보 수집을 위해 이북에 첩보원을 보내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부대가 KLO부대이다.그러다가 6ㆍ25 전쟁 후 이들 첩보부대는 육군, 해군, 공군에서 독립적으로 부대를 창설 했는데. 그때 육군에서 창설한 첩보 부대를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 명했다. 장철은 그날 나하고 얘기를 나누다 또 저녁이 되자 여자 생각이 났는지 혼자서 술집으로
월남 한국군 파병은 1964년 5월 9일에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의 제안으로 한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한국 군사 원조단 본부인 ‘비둘기 부대’를 창설해 1965년 3월 10일에 인천항에서 파병한 것이 최초다.그 다음 1965년 6월 14일 ‘주월 한국군 사령부’를 창설해 채명신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 다음 청룡 부대가 1965년 10월 9일 부산에서 출발해 월남 깜란에 상륙하고 그 해 11월에 명호 부대가 뀌논에 상륙했다. 대한민국에서 월남으로 파병한 병사는 32만 명에 달한다. 파병의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장철이 월남
기지의 광경에 대원들은 모두 놀라고 만다. 폭격에 무너진 건물이나 쓰러진 나무는 보이지 않고 땅이 파헤처져 흙더미뿐이다. 사람이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다음 날이면 다시 병사들이 기어나와 아군을 습격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원들은 어처구니없는 현장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진짜 유령이 존재하는 것인가? 대원들은 현장을 확인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원들은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기지 주변에서 24시간 잠복하기로 한다. 저녁이 되고 밤이 깊어진다.
장철이 여자 때문에 이탈했다는 말을 듣고는 “목숨보다 여자가 더 중요하냐?”라며 더 심하게 때렸다. 장철은 얼마나 맞았는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도 구했고, 군사 재판에 회부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아픔을 참아야 했다. 푸이판마을은 명호부대와 청룡부대의 합공으로 공격 개시 3일 만에 완전히 베트콩을 소탕할 수 있었다. 500여 채의 집 중 온전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중에 한국군은 이들 양민들이 살아갈 집을 300채 지어 주었다. 유령의 적 기지장철이 소속되어 있는 맹호부대 13대대
멀리 있는 미군 포부대에서 폭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명호부대 3대대가 마을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김상식 특수요원 대장이 촌장을 구출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공로는 장철에게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장철이 왜 무리에서 벗어났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철이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장철이 살아있다고 해도 그를 구출하러 다시 마을로 들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대는 장철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장철은 마을에 남아있으면 결국은 폭탄을 맞고 베트콩과 같이 죽음
푸이판 마을 침공작전 1967년 무렵 월남의 남북 경계선인 17도선 아래에 있는 청룡부대와 그 아래 맹호부대, 백마부대가 있는 해안선에는 베트콩이 장악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 해안선을 막고 있는 베트콩 섬멸 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을 ‘오작교 작전’이라 했고 장철이 파월 당시에는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그래서 큰 분쟁 없이 소소한 전투가 이뤄지고 있을 때다. 맹호부대 인근에 600여 가구가 사는 푸이판마을의 촌장은 베트남 정부의 충실한 조력자다. 무슨 일이든 협조하며 마을 소년들을 외지로 유학 보내 정부의 요원으로 등용시키곤 했다.
인기척은 더 가까워진다. 같이 보초를 서는 장병은 공포에 떨었지만 장철은 침착하게 그를 안심 시켰다. 드디어 인기척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두 명이었다. 이들은 부대까지 기어 와서 수류탄이나 폭탄을 던지고 도망갈 계획 같았다. 이제 코앞에 있는 베트콩의 검은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두 병사는 꼼작하지 않고 기다렸다. 드디어 손을 내밀면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왔을 때 장철과 다른 병사는 후다닥 일어나 베트콩을 덮쳤다. 앞에서 괴한이 갑자기 뛰쳐나오는 바람에 베트콩은 놀란 나머지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그만 장철 일행에게 잡
베트남 궤논항 앞바다에 도착한 수송선에서 병사들은 상륙선을 나눠 타고 궤논항으로 입항해 맹호부대 사령부로 들어갔다. 당시 파월 맹호부대 사령관은 유병원 소장이었다. 그는 훈시에서 신참 장병에게 “베트남에는 베트콩이 있는 곳도 없고, 없는 곳도 없는 곳이다. 그러니 각별히 조심해서 생활해야 한다”라며 단단히 일렀다.해변을 등지고 있는 사령부에서 2박 3일 적응 훈련을 마친 장철과 신참 병사들은 분산되어 사령부 내 곳곳으로 배치되었다. 장철은 쏭가오 해산진 부대 26연대에 배치되었다. 연대는 본부를 축으로 원을 그리듯 대대가 500m
1960년 정도에서 이야기가시작한다. 경상남도 삼천포시,지금은 사천시로 변한 곳이다.장철의 할아버지인 장주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경남 사천에서 땅이 가장 많았던 분으로 그 땅에서 수확되는 쌀이 일년에 천석이 된다해서 사람들은 그를 ‘천석꾼’이라 불렀다.장철의 아버지는 나라가 해방되자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귀국선을 탔다가 침몰 사고로 타계했고, 그 후 일본인 인 어머니는 일본으로 떠나버려 장철은 자기 형과 함께 천석꾼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부모 없이 자란 장철은 인자한 친구의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 어머니”라면서